드디어 몸을 옮겨 영죽으로 왔다.

낯선 환경, 낯선 이웃 그리고 낯선 풍경들 - 너무 낯이 설어 무엇부터 해야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인터넷도 전화도 아직 설치 전이었고 그 와중에 핸드폰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그래도 핸드폰은 작동하리라 기대했지만 LCD화면의 전파감도를 나타내는 안테나 표시는 겨우 두 칸이 고작이었다. 받아야 할 전화도 많은데 전화기는 말 그래도 캔디폰이 되고 말았다. 넓디넓은 운동장을 돌며 비교적 감도가 좋은 자리를 찾아 겨우 급한 용건 몇개를 처리했다.

어쨌든 가장 급한 것은 외부와의 통신 회복이었다. 서둘러 KT, SKT, LGT에 연락을 하고 눕기 전에 자리는 봐두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에 짬짬이 자생초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일, 간이중계기 설치로 휴대전화 통신문제는 가까스로 해결했는데 인터넷은 여전히 불통이다. 영죽에서 급한 일을 처리하고는 대구 부산을 돌아 분당으로 왔다. 고작 5일 정도 집을 비웠을 뿐인데 마치 먼 길을 돌다가 온 듯 피곤했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깨어나 앉아 조간신문을 읽은 뒤 습관처럼 PC 앞에 앉았더니, 화면 한켠에 떠오르는 노무현 대통령의 실족 소식. 처음 이 소식은 실족이었고 사망 여부는 나타나지 않았다가 계속 실족사, 자살 등으로 확대되었고, 화들짝 놀라 켠 TV에서는 특보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거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그의 부음을 접하면서 이상스레 마음은 여름 새벽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처럼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집권 동안 한미FTA 추진이나 해외파병, 양극화 심화 등등 더러 실책으로 여겨지는 부분도 있지만,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로 그런 식으로 평가되어도 괜찮을지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권력기관을 국내정치에 이용하지 않은 것 등등의 바람직한 변화도 있었다.

어쨌든 그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작업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상스레 차분한 마음으로 황급히 옷가지를 챙기고 미처 일어나지 않은 가족들에게 인사 한마디 남기지 않고 다시 영죽으로 들어왔다.

영죽에 도착해서는 밤늦게 까지 예초기로 자생초를 깎았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땀이 뻘뻘나고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머리 속은 여전히 맑고 청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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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초와의 싸움은 필패

자생초를 깎으며 덕수궁 대한문 앞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분향소와 삼삼오오 그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분양소 진입을 막는 경찰을 생각했다.


나와 자생초와의 싸움 - 이것은 이미 패배가 예정되어있는 싸움이다.

저들과 국민의 줄다리기 - 이것 역시 나와 자생초와의 싸움처럼 반드시 필패로 끝날 수 밖에 없음을 저들은 정말 모르는 모양이다.

사이비 귀농

2009/05/15 15:06

귀농을 염두에 두었을 때 미처 도시에서 완성을 보지 못한 꿈을 그리고 완성을 향해 진행 중인 꿈을 떠올렸다.

"그 둘은 병립할 수 없는가?" 라는 자문을 끌며 줄곧 탄천변을 거닐었고, 이제 그 문제의식 뒤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플랜을 실천할 순간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다른 이들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귀농, 이름하여 사이비 귀농을 시작하려 한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그 답을 찾을 뿐이다.


헬렌과 스코트가 뉴욕을 떠나 버몬트에 정착한 것은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스스로의 신념에 따른 선택이었고, 내가 대한민국의 정중앙 중원고구려탑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내 신념에 의한 최선의 방법이 거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일, 모레 그리고 글피 - 회사와 함께 나는 이사한다. 그리고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일상이 너무 팍팍해서인지 그간 매일 아침마다 들여다보는 한겨레신문의 주주가 될 기회를 잡지 못했었다.

마음이 동했을 때는 여윳돈이 없었고, 정작으로 돈이 있었을 때는 시간이 없었다.

더군다나 한겨레신문 주식은 초기 온라인 장터의 P2P거래처럼 전적으로 거래 당사자 간에 계약서를 비롯한 모든 관련 서류를 주고 받으며 거래를 마무리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간에 누가 나서서 그 거래를 에스크로 해주는 것도 아니어서 주식매매대금을 주고 받는데도 안정성의 문제가 있어서 이미 마우스 몇번의 클릭으로 종결되는 온라인 주식거래에 익숙해져버린 내게는 마음은 있되 몸이 안따르는 그 무엇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한겨레신문을 펼치는 아침마다 미안하고 찝찝했다.
왠지 전쟁터에서 혼자만 빠져나와 따스한 햇볕을 쬐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가 정권을 잡고 당당하게 매체에 얼굴을 들이밀 때부터 이 찝찝함의 농도는 더욱 짙어져 갔다.

2008년 5월부터 시작된 촛불문화제의 폭력적 해산이나 용산 철거민들에 대한 공적 살인에서 보듯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당연히 부여된 국민에 대한 보호 의무는 전혀 아랑곳 않고 마치 조폭 두목처럼 제 주변만 챙기는 추악한 행태는 저 암울한 1980년대를 헤쳐온 내 청춘기 절망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볼 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이고 모범적인 사람이고 계급의식에 투철한 사람이다.

자신이 쟁취한 그 모든 권한을 온전히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또한 사회에서 스스로의 성공을 담보했던 바로 그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구리 박 ! - 이것이 넷상에서 떠도는 그의 여러 별명 중 하나이고 보면 전국토를 헤집는 그의 행태 역시 이해못할 바는 아니겠다. 더군다나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조언을 해댈 70년대 풍 원로들의 면면을 보면 불현듯 타임머신을 타고 대학시절로 돌아와있는 듯 하다.

어찌되었든 그는 그렇다치고 그럼 나는 어찌할 것인가!

나는 이미 보도블록 깨날렸던 80년대의 학생 신분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고 어느덧 이만치 세상을 알아버린 터에 내가 할 바는 무엇일까?

이 고민으로부터 내 사이비 귀농은 비로소 트리거가 당겨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이 전적이 원인은 아니겠지만, 예상보다 일찍 행동에 돌입할 수 있도록 추동한 것만은 사실이고 그로 인하여 내 귀농은 서두른 결과가 항용 그러하듯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어정쩡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다소 미흡하고 스스로 불만족스럽지만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자위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사이비 귀농을 결정한 그 순간 나는 한겨레신문 주식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사며 당당히 한겨레신문의 주주가 되었다. 우려했듯 그 구입과정은 번거롭고 짜증스러웠지만 한참을 걸려 한겨레 주식을 받아들었을 때는 기쁘다기보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건 첫째로 한겨레신문의 경영상태가 설립 이후 이제까지 단 한차례의 주주배당도 못할만큼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제대로 된 신문을 응원하"겠다는 의지로 기꺼이 한겨레의 든든한 주인이 되어주었던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이 이제 그도저도 포기하고 얄팍한 중산층의 허울을 뒤집어쓰겠다는 아쉬운 변절로 내게는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저마다 피치못할 사연이 있음을 나 아쉬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나이가 이미 되고 말았다.

그나저나 한겨레신문과는 어떤 비즈니스를 함 해볼까?

호치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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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든 ‘간디’

유교적 교양을 쌓은 인문주의자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베트남 독립을 설계하고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한 투쟁에서 승리한 민족 지도자. 20세기 국제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 죽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

호치민의 삶과 경력은 신화 속에 가려져 있으며, 지금까지 그토록 중요하면서도 자신을 철저히 감춘 이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전기는 나온 적이 없었다. 이제 마침내 베트남 문제의 세계적 권위자가 최근에 공개된 정보와 문서들을 끌어들인 탁월한 전기를 펴냄으로써 이 빈 부분을 메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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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대표와 악수하는 호치민

호치민은 인간해방을 열망한 공산주의자이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지치지 않고 투쟁한 민족주의자였으며,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듀이커는 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스크바, 베이징, 워싱턴과 끈질기게 협상함과 동시에 이 세 강대국의 반목을 교묘하게 이용하던 과정을 밀도 높게 재구성하고 있다.

철저한 조사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도 매혹적인 이 평전은 우리 시대의 가장 우뚝하고 신비스러운 인물, 영감과 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계시적인 초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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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7월 16일 ‘TIME’지 표지에 등장한 호치민

저자인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에 관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역사학자이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해외 파견 장교로 사이공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호치민이란 신비로운 인물에 매혹됐다. 그 후 거의 30년 동안 베트남과 중국, 러시아, 미국에 있는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수많은 관련자들을 인터뷰한 끝에 호치민에 관한 엄청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했다. 《호치민 평전》은 이 기나긴 조사, 연구의 총체적 성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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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 자유를 향한 열렬한 갈망, 인내와 투쟁의 화신

1890년, 청빈한 삶을 고집했던 총명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호치민은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21살 때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활동으로 수배령이 떨어지자, 조국 인도차이나를 떠나 여객선의 요리사 보조 노릇을 하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떠돌았다.

이 시기에 훗날 호치민의 혁명적 삶의 초석이 놓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후의 격동하는 시기에 그는 런던과 파리에서 정원사, 청소부, 하인, 사진 수정사 등 다양한 허드레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국제 공산주의 조직에서 반식민주의 투쟁의 대의를 알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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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감옥의 수감생활 이후(1932년 12월) 수척해진 호치민의 모습에서
그의 감옥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그는 1934에야 모스코바에 당도한다

듀이커는 호치민이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비상하는 과정, 쉰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며 혁명을 배우고 선전하던 세월, 수감과 아슬아슬한 탈출, 조국의 초대 주석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극심하게 분열되곤 하던 동료들을 화해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던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낸다. 또한 디엔 비엔 후, 텟 공세를 포함한 중요 전투의 기획에서 호치민이 담당했던 역할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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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 비엔 후 전투를 승리로 마감할 전략회의를 주도하는 호치민

▶ 역사상 미국과 맞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지도자

유고의 티토, 리비아의 가다피, 쿠바의 카스트로, 칠레의 아옌데…… 이들은 모두 제3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이지만 이 가운데 아무도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대항하여 승리한 사람은 없었다. 오직 호치민 만이 일대일로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제국주의 침략을 꺾고 조국 해방을 이룩한 유일한 제3세계 지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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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하노이에서 쿠바정부 방문단과 함께한 호치민

1975년 4월 30일, 소련제 북베트남 탱크들은 사이공 시내로 진입했다. 황금별이 박힌 독특한 철모를 쓴 탱크 위의 병사들은 임시혁명정부 깃발을 흔들었다. 대로를 통과하여 대통령 관저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철문을 뭉개고 들어가서는 관저 지붕 위의 베트남공화국 기를 내리고 빨간색과 파란색이 어울린 임시혁명정부 깃발을 올렸다.

4월30일 오전 11시 정각,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제1대대 소속 탱크 다섯대가 철문을 부수며 대통령궁에 진입했다. 바로 그 시각 남베트남의 즈엉반민 대통령과 부반머우 총리가 이끄는 내각의 국무위원들은 대회의장의 소파에 앉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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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30일, 해방군들이 대통령궁을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궁 안으로 진입하고 있는 탱크

해방군이 들어서자 즈엉반민이 일어서서 말했다. “당신들이 왔군요.” 그러고는 항복 각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남베트남 정권의 최후였고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의 종말이었다. 사이공 거리에는 메가폰을 든 베트콩들이 나타나 외치기 시작했다. “사이공은 해방됐다. 겁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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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4월30일 오전 11시, 북베트남의 월맹군이 남베트남 사이공의 대통령궁 회의실로
들어닥치는 순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를 기다리고 있는 즈응 반 민 대통령(가운데)과
부 반 머우 수상(오른쪽), 응웬 반 후옌 부통령(왼쪽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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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응 반 민 내각의 국무위원들이 회의실로 들어온 해방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왼쪽에서 첫번째가 응웬반하오 부총리, 두번째가 부이 뜽후언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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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군 병사 한명이 남베트남 대통령 경호대 병사들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기나긴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954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베트남에 개입한 미국과 1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인은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그들은 미국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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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시신이 안치된 추모관 - Ho Chi Minh's tomb, Hanoi

공산주의자들이 사이공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베트남노동당 지도자 레 두안과 그의 노련한 동료들의 결의와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다. 또한 북베트남 군대와 베트콩 게릴라들도 그들 못지않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한 인간의 비전과 의지와 지도력 덕분이었다. 그는 베트남공산당의 창건자이고, 혁명 운동의 지도자이고, 종전 6년 전인 1969년에 사망한 주석 호치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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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프랑스 대통령과 악수하는 호치민

호치민은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노선을 추구한 탁월한 외교가였으며, 기회만 된다면 힘이 아니라 설득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였다. 타협을 하려는 그의 태도 때문에 적들은 무장을 해제했고, 그는 군사적 약점을 정치적 이점으로 바꿀 수 있었다.

동시에 소박하고, 착하고, 사심 없다는 이미지는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하여, 국내외에서 심지어는 적국인 미국에서까지 베트남 혁명과 독립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 전쟁은 실제와는 매우 다른 사건이 되었을 것이고, 매우 다른 결과들을 낳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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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타이핑한 편지와 문서로 세계의 여론을 이끌었다

▶ 절반은 레닌, 절반은 간디

'호'는 당의 창건자이고 나중에는 베트남의 주석이었을 뿐 아니라, 영감을 불어넣는 최고의 상징이었다. 호치민은 빈틈없는 전략가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일 뿐 아니라 재능 있는 조직가로서,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였다. 호치민은 그 둘을 역동적으로 결합한 인물이었다.

모스크바 코민테른의 요원이자, 국제 공산주의 운동 참여자, 베트남 승전의 기획자로서 호치민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가장 큰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그늘 속에 감추어진 인물로, 그의 목적과 기록들은 오래 전부터 논란을 일으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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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호치민

윌리엄 J. 듀이커가 책 전체를 통해 초지일관 파고드는 쟁점은 호치민이란 인물에 대한 성격 규명이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가. 성자 같은 그의 소박한 이미지는 진짜인가 아니면 단순한 책략인가.

호의 지지자들에게는 혁명적 인도주의의 상징이며, 동포의 복지와 전세계 피억압 민족들의 해방에 헌신하는 아저씨 같은 인물이었다.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 투쟁을 지도하는 소박한 애국자이며, 제3세계 전체를 대표하여 제국주의에 강력하게 대항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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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파들은 호치민이 오랜 세월에 걸쳐 요시프 스탈린의 요원이었던 점을 지적하며, 그의 애국적 동기에 의문을 제기했다. 호치민이 열심히 만들어놓은 민족주의 이미지는 대내외로부터 혁명적 대의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호치민을 둘러싼 논쟁은 민족주의, 혁명, 평등, 인간 자유를 추구하던 시대인 20세기의 중심 쟁점들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호치민의 성격의 복잡성은 시대의 복잡성을 반영한다. 그는 전후 베트남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동시에 틀림없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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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호치민

호치민이라는 인물은 근대 사회의 중심적인 힘 두 가지를 반영하고 있다.
하나는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며, 또 하나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이다.
그는 인간의 평등한 삶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진지한 사회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무엇보다도 민족 전체의 해방을 열망했다는 점에서 의심할 수 없는 민족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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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품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 한장

저자는 신비에 감싸인 호치민이란 인물의 객관적인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 필자 나름의 해석은 최소한으로 자제하면서 사실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방법이 호치민의 삶의 극적인 성격과 그의 삶이 베트남과 20세기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제대로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으로. 결국 우리는 위대한 정치적 인물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전기를 얻게 되었다.

호치민 (胡志明) : Ho Chi Minh


세계 최강국을 항복시킨 베트남의 영웅
그의 이름은 ‘호 아저씨’로 민중의 가슴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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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胡志明) : Ho Chi Minh (1890-1969)
본명은 Nguyen Tht Thanh. Nguyen Ai Quoc이라고도 함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시킨 베트남 민중의 영웅. 뒤이어 베트남을 침공한 미국에 맞서 싸워 기적적인 승리를 쟁취하며 모택동 이후 가장 유명한 혁명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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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군의 수장이자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면서도 너덜너덜한 외투와 다 떨어진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어린이들과 놀아주는 등 눈물 겨울 만큼 스스로를 낮추고 민중의 삶과 평생 함께 했다.


식민지 국가의 막내 아들 – 가시밭길의 인생을 출발하다

1883년 프랑스의 무력 침공으로 식민지가 된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 통치 아래 철저하게 수탈당했고, 국가 경제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 갔다.

1890년 프랑스 지배를 받던 베트남 상류층 명문가의 막내 아들로 출생. 그의 아버지는 핍박받는 베트남 국민을 위해 스스로 공무원 직을 사퇴하고 전국을 떠돌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집안은 몰락했지만 지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 경전과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개혁적 성향을 본받아 프랑스의 가혹한 세금제도에 저항하는 등 반체제 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당시 프랑스 본토에 만연돼 있던 자유주의와 급진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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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의 호치민

1차 대전 후 유럽으로 건너간 베트남인들은 그곳에 만연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시민혁명사상에 감화를 받고 귀국해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이끌기 시작한다. 이들은 프랑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지하에 숨어 들어 국민들을 계몽하며 게릴라전와 테러전을 수행한다. 인텔리겐챠와 청년혁명가들이 주도한 이런 일련의 지하 독립운동은 이후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를 무찌르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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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산당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호치민 (호치민의 다른 이름: Nguyen Ai Quo)

호치민(그의 본명은 ‘Nguyen Ai Quo’라 함)은 1911년 부두 막노동꾼으로 취업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파리에서 사진 보정 기술자로 일했고, 새로 창설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이곳에서 체계적인 독학을 통해 방대한 지식을 터득했으며 혁명사상과 애국주의를 체득한다.

1919년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과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요구서를 넘겨 주려다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는 여기서 서구 열강들이 결코 평화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는 교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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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자료

이후 그는 동양의 공산 혁명가 중 가장 화려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세계 공산당 대회에서 제법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소련으로 건너가 레닌 대학을 졸업하고 민족과 식민지 문제 연구소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공산당의 비밀 요원으로 랑군과 캘커타 등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첩보전과 교란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는데, 귀신 같은 변장과 잠적으로 수없이 많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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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지하독립운동 할 당시의 혁명동지들과 기념촬영 (앞줄 왼쪽)

1925년,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지식인과 청년들을 대중 속에 보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베트남 혁명 청년동지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1929년에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당을 결성, 군대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1940년 2차 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군이 베트남으로 진군,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 정권을 격퇴한다. 초기 베트남 인들은 일본을 해방군으로 오인했으나, 호치민은 일본 역시 제국주의자들과 한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 독립전선을 조직, 일본군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의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이때 호치민은 자신의 공산주의 노선을 변경한다. 지주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는 전형적인 공산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자와 매국노의 토지만 몰수해 빈농에게 배분하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이대로 식민지배가 계속되면 결국 베트남인 모두가 공멸할 것이라는 논리로 베트남의 기득권 및 지주층를 설득해 나갔고 전개했고 이때부터 그의 게릴라 전술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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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독립을 선포하는 호치민

1945년 호치민은 패망해 가던 일본군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마침내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도 잠시, 쫓겨났던 프랑스 군대가 질서 유지를 보조한다는 명분 아래 베트남을 재침략 한다. 1946년,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1명이 죽을 때마다 베트남인 10명이 희생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은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

호치민의 말은 현실화 되었다.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맹위를 떨친 비행기, 장갑차, 대포 등의 막강 화력으로 베트남과의 전쟁을 치루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 군은 패색이 짙어 갔다. 호치민의 군대가 이미 거의 모든 민중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호치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농민들은 게릴라 부대에게 식량을 가져다 주었고, 도시민들은 프랑스 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프랑스 군대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1954년 베트남 군은 총반격을 개시, 디엔 비엔 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는 8년 간의 전쟁 끝에 남부 베트남에 괴뢰 정부를 남긴 채 완전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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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 비엔 후 전투에서 사로잡은 프랑스군 포로들

호치민은 이제 베트남 민중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굳은 결의로 베트남을 독립된 국가로 재건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던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55년 프랑스를 섬기고 있던 베트남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내고,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삼아 새로운 남베트남 정권을 세운다. 그러나 딘 디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수많은 실정과 부정을 저질러 끊임없는 민중 봉기와 쿠데타를 겪어야 했고 붕괴 위기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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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딘 디엠 정권의 부패정치에 항거하여 불교승려가 분신하는 모습

미국은 남베트남의 위기를 북베트남의 침략과 공작으로 규정,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전을 일으킨다. 미국은 이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의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구축함을 폭파시키고, 베트남 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일명 “통킹만 사건”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은 100만에 달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역을 쉴 사이 없이 폭격해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900만 톤으로 이는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한 전체 폭탄의 양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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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자료사진

그러나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군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살육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20년 혹은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끝내 이길 것이다."

호치민의 군대는 소련이 지원한 전쟁 무기와 전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미군을 쉴 사이 없이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와 싸울 때 발휘되던 게릴라 전술은 힘을 더했다. 호치민의 군대의 정말 무서운 점은 포용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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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되고 있는 호치민 루트(Ho Chi Mih Trail)의 민가들
베트콩들은 이 호치민 루트를 이용하여 야간에 총포와 화기, 식량 등을 공급했다.
‘호치민 루트’가 없었다면 북베트남 해방군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그는 베트남전쟁의 종식이 임박한 196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유언한다. 그러나 베트남 인들은 자신들의 영웅 호치민을 방부 처리해 영원히 전시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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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지민 동상 ( Ho Chi Minh statue) - 구 시청건물 앞

1973년 마침내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후 베트남에서 전면 철군한다. 그리고 호치민이 죽은 지 6년 뒤인 1975년, 그가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킨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과 해방을 쟁취한다. 프랑스와 세계 최강국 미국을 연이어 격퇴시킨 혁명가이자 불멸의 용사 호치민. 세계 최강의 혁명가이자, 베트남군의 수장, 그리고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면서도 그는 평생 검약한 민중의 삶을 살았다.

너덜너덜해진 외투에 달아 빠진 고무신, 아이들에게 자상한 "호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


건조한 눈빛, 쓰디 쓴 그대 의 혀   항상 말만 앞서고 행동하진 못해.
나는 좀처럼 스스로 판단할 수 없어   필요한 건 Rocket Punch.
때론 나대신 싸워주는 로봇   그건 말도 안 되는 만화 속 이야기
너의 어깨가 부셔져라 부딪혀야 해.    1 & 2 & 3 & 4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    Rocket Punch Generation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You have to cha, cha, cha, change yourself.

대체 왜 그래 뭐가 부끄럽다고   딱딱해지는 몸짓 빨개지는 얼굴
삶은 언제나 그렇듯 오르막 내리막    Tricky, Freaky, Break it my heart.
누가 뭐래도 무거운 신념 하나     너의 가슴 속 깊이 못을 박아두고
결국 뱃머리 돌리는 건 바로 나 캡틴 Whale   5 & 6 & 7 & 8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    Rocket Punch Generation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You have to cha, cha, cha, change yourself.

Oh~! Love me & love you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으니
Hold me & I`ll hold you   또 이보다 더 나빠진다 해도 우리.

이미 지난 일은 후회하지 마.   Rocket Punch Generation.
불안할 것 없어 다가올 일도 중요한 건 바로 지금  I have to cha, cha, cha, change my,
You have to cha, cha, cha, change your, We have to cha, cha, cha, change ourselves.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  Rocket Punch Generation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You have to cha, cha, cha, change yourself.

살둔 제로 에너지 하우스

2009/05/13 23:03

 

시골 생활에서 고민스러운 것 중 하나는 도대체 어떤 집에서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대책없이 높아질 에너지 구입 비용은 그러한 고민을 더욱 깊게 할 것이다.

 

그러한 고민에 빠져있는 사람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곳 - 살둔 제로 에너지 하우스

 

농법정하기

2009/05/13 22:36

수 년 전부터 농법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장래 귀농을 한다면 어떤 농법으로 농사를 지을 것인가 하는 고민인데, 이는 미리 도시에서도 관련 정보를 어느 정도까지는 얻을 수 있는 사항이라 게으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얻어들은 정보라는 것이 직접 땅을 갈며 익히는 정보가 아닌 까닭에 그야말로 탁상공론에 그칠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래도 사전 정보 부족으로 농사를 망쳤다는 자책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많은 정보를 기웃거렸고, 그 중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농법을 몇년 전에 발견했다.

이름하여 <태평농법> 

<태평농법>의 대원칙은 "무경운, 다모작, 건답직파"로 정리할 수 있을 듯 하다.

언뜻 들어서는 간단할 것 같지만 현재 널리 시행되고 있는 관행농법에 비추어 볼 때 이 원칙은 거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무경운 

    경운이라는 말은 경작지를 간다는 말로 현재의 널리 시행되는 관행농법에서 경운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태평농법은 경운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경운이라는 것은 기계 등 물리적 방법으로 논밭을 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태평농법은 흙 속 미생물에 의한 생태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경운을 한다. 관행농법에서 행하는 기계식 경운은 화산재 토양인 일본에 적합한 것으로 화강암 토양이 대부분인 우리의 토양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과거 선조들이 경운을 할 때에도 지표면만 살짝 뒤집는 정도에 그쳤지 지금처럼 깊게 땅을 뒤엎어놓는 농법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깊게 경운할 경우 땅 속 깊은 곳에 있던 자생초 씨앗이 햇빛 아래로 나오게 되어 논밭이 온통 자생초밭이 될 것이고 그걸 없애느라 또 많은 농약과 수고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 다모작
다모작을 하게 되면 가장 염려되는 점이 연작에 의한 피해라고 한다. 즉, 동일한 작물을 연이어 재배할 경우 미처 분해되지 못한 앞 작물의 섬유질이 논밭에 남아있어서 이어 심은 작물의 생장에 피해를 입히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태평농법의 경우, 서로 보완하는 작물을 연이어 심음으로써 연작피해를 방지하고 있단다. 벼 그리고 보리와 밀을 연이어 심을 경우 연작 피해가 없다고 한다.
  • 건답직파
직파는 종자를 모종을 하지 않고 직접 논밭에 뿌린다는 의미이다. 거의 모든 관행농법이 모종을 해서 이를 다시 논밭에 옮기는데 태평농법은 그냥 마른 논밭에 직접 씨를 뿌린다. 모종과 이앙 등의 수고로움이 전혀 필요없게 된다.

수십 년 동안 태평농법을 연구해오신 이영문 님은 자신의 농법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몇 권의 책을 내시기도 했다. 직접 여쭈어본 것은 아니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판하신 것은 모두 4권이 아닐까 싶고 몇 년에 걸쳐 이 책을 모두 모아 암기하듯 수차례 읽었다.

이 중 2권은 품절이라 시중에서 구하기가 어렵고 2권은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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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흙 속에 있다 1999년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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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 이야기 2001년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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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이가 전하는 태평농 이야기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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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주인이라고 누가 그래요?  2007년

워낙 글을 쉽고 명쾌하게 쓰셨기 때문에 이해하기에 어려운 점은 없으며, 태평농법 전반에 걸친 기술적인 부분 보다는 태평농법의 당위성이나 필요성 그리고 평소 농사를 지으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자연, 인간 그리고 사회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으셨다. 태평농법 자체의 기술적인 궁금증은 홈페이지의 Q&A를 참조하시면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말로는 쉬운데 막상 20여 평의 드넓은(?) 실험용 밭을 앞에 하고 보니 암담하기 그지 없다. 더군다나 태평농법은 농사의 시작은 가을이라고 너무나 강조했는데, 이런 지금의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다. 태평농법 홈피에서 자문을 구해야겠다.

장소를 정하다 2

2009/05/13 22:11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죽분교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 1필지와 밭 4필지가 포함되어 있고 교사동 뒤편 마당에도 밭이 하나 더 있었다. 헌데 이 모두를 어느 부지런한 주민이 미리 써레질을 해놓았다. 사연인즉, 교육청과 나와의 임대계약이 늦어지자 학교 정문 바로 앞집 주민이 농사를 지으실 요량으로 미리 써레질을 해놓은 것이라는데 교육청에서 씨뿌리기를 만류하시는 바람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손을 놓고는 제가 나타나기만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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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30. 정문 옆의 밭. 오른편 진입로 너머에도 비슷한 규모의 밭이 더 있다

내가 교육청과 계약 후 학교를 방문했을 때 한달음에 나를 찾아온 주민에게 얼른 씨앗을 뿌리라고 말해두었다. 올해는 크게 농사지을 것도 없고 괜히 빈 농토만 놀릴 듯한 생각에서 그렇게 조치했다.  다만 아래 사진의 교사동 사이에 만들어져있는 밭은 내가 연습삼아 사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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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30. 교사동 사이의 마당도 어느 틈에 주민에 의해 밭으로 바뀌어 있다

그래도 20평은 족히 되보였고, 올해 여름에는 이곳에 밭작물 몇 종을 심어볼 예정이다. 지독히 인스턴트적인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내 생체시계가 여름 하늘 구름처럼 느긋하게 흘러가는 자연의 시간을 얼마나 견딜는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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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정하다 1

2009/05/13 21:55

무릇 어떤 곳을 가든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장소가 갖는 제약성 혹은 한계 때문인데, 어느 한 곳을 선택해서 살다보니 그 곳이 처음 생각과는 달리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다 해도 마트에서 물건 바꾸듯 그렇게 쉽사리 이동하는 것은 자금이나 시간 등 현실적인 어려움을 수반하게 된다. 따라서 장소를 정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지인의 추천을 받거나 현지에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경우인데,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마을을 정한 후 그곳에서 임시로 살아볼 것을 많은 선험자들이 권하고 있다.

시골은 도시와 달리 전세라는 개념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증금이 있는 월세의 형식도 많지 않다. 이는 전세나 월세 기간이 끝났을 때 다음 입주자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인 듯 하다.

시골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세입제도는 일년 치 월세를 선납하고 사는 방식으로 도시에서는 이런 형태를 깔세라 고  하는데 아무튼 이런 형태가 보편적인 듯 하다.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년 1백만원부터 실로 다양하게 있다. 이런 물건은 지역의 부동산에서는 거래되지 않고 동네 주민 사이에서 알음알음으로 거래가 되는 듯 했다. 따라서 이런 주택을 구하려면 동네를 먼저 정하고 그 동네 점방(도시로 치면 슈퍼)이나 이장님을 찾아가 묻는 게 최선인 듯. 동네 점방 주인이나 이장님은 그 동네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부터 일반 농가주택은 관심에 두지 않았다. 그것은 향후 사업과의 연관성 때문이며, 아무튼 2008년 여름부터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교육청 홈페이지를 매일같이 노려보며 적당한 폐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폐교의 장점은 첫째로 부지가 넓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보통 폐교의 경우 그 넓이가 대략 3,000평 정도에 이르고 교사동을 비롯한 여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나처럼 자질구레하게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붙잡고 어지르는 타입에게 폐교는 최선의 선택이랄 수 있다. 또한 폐교의 지적도를 살펴보면 대개 논이나 밭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꽤 많아서 별도로 밭이나 논을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다. 설령 부속 논밭이 없다해도 넓은 부지 중 일부분을 논밭으로 사용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주변 농가에 소작을 해도 문제가 전혀 없다. 소작의 경우 소작료를 시골에서는 도지라고 하는데 그 소작료가 무척 싼 편으로 대개 논 1마지기(200평 정도)의 소작료가 3말(3kg) 이하인 듯 하다.

둘째 장점은 별도의 시설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데, 폐교는 정해진 기간(보통 3년에서 5년)의 임대차계약이 끝나게 되면 기존의 임차인과 재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공개입찰에 붙여야만 한다. 이것은 많은 시설투자를 해서 사업이든 생활이든 잘하고 있다 해도 계약기간 종료 이후 재계약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과도한 시설투자를 할 이유가 없으며, 기존 시설을 잘 보수해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2008년 겨울을 꼬박 기다린 끝에 2009년 4월에 드디어 충주교육청으로부터 폐교를 임대받았다.

학교는 충주시 앙성면 영죽리에 위치한 영죽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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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30 영죽분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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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30. 영죽분교 교사 뒤편. 사진 중앙에 수령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물푸레나무

영죽분교는 충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1km 부근에 맑은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남한강 너머는 원주시 부론면이고 일대가 남한강 수변관리지역에 포함되어 인근에 오폐수를 발생시키는 여타 공장이나 축사가 없기 때문에 무척 청정한 곳이다.

학교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손봐야할 곳이 많을 듯 하다.
면적은 대략 1만제곱미터가 넘고 4필지의 밭과 1필지의 논이 포함되어 있다. 계획하고 있는 농법으로 작물을 시험재배해 보기에는 적당한 크기로, 시험재배는 천천히 계획을 세워서 6월부터 추진할까 한다.

가장 우려했던 전기와 수도도 아무 염려없이 잘 가동되고 있었다.

전기는 기존에 사용했던 분이 여전히 관사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받아 사용하면 될 것이고 수도는 전기모터에 의해 지하수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 맛도 좋았다. 동네주민은 물이 어찌나 깨끗한지 받아둔 채로 한달을 지내도 물 이끼나 물 때가 전혀 끼질 않고 처음과 똑같다고 자랑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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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4.30. 동파 방지를 위해 단열비닐로 씌워놓은 지하수 수도꼭지와 연못

....continued